큰 기대와 작은 성과

한 컴퓨터가 여러 컴퓨터에게 동시에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는 멀티캐스트를 스티븐 디어링(미국)이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그 동안 일대일 통신에만 머물러왔던 인터넷 프로토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 제안되었을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아주 대중적으로 상용화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멀티캐스트 기술은 제한적으로 학계를 중심으로 활용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상용화 되고 대역폭도 늘어나고 다양한 응용이 개발되면 멀티캐스트는 중요한 기술로 활용될 것으로 모두들 기대하였다.

특히,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콘텐츠를 효율적으로 전송할 수 있는 멀티캐스트 기술은 기존의 네트워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응용의 영역을 개척해줄 것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이에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에서는 여러 개의 작업반을 형성하여 필요한 기술의 표준화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금방 현실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인터넷 프로토콜(IP; Internet Protocol)수준의 멀티캐스트가 동작하기 위해서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놓인 패킷 전송 장비 인 라우터가 멀티캐스트 기능을 지원하여야 하는데 이미 멀티캐스트를 지원하는 라우터가 널리 보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상업적인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ISP; Internet Service Provider)들은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현재로서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IP 수준의 멀티캐스트를 활용할 수 없다.

멀티캐스트 상용화의 실패 원인

IP 수준의 멀티캐스트를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이 활발히 지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연스런 진화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성공을 거둔 대다수의 응용이나 기술은 인터넷의 기반이 제공하는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기술 즉, IP 데이터그램의 전송 기술만을 활용하여 구축되며 그 응용이나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고 사용자가 늘어나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이 자연스럽게 기반에 흡수되는 되먹임의 경로를 거치게 되면서 더욱 진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실상 인터넷 기반 자체를 크게 바꾼 응용은 아직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직 널리 쓰이지는 않지만 서비스 품질 기능(QoS; Quality of Service)이나 MPLS(Multiprotocol Label Switching), VLAN(Virtual LAN) 정도가 그나마 기반으로 “어느 정도” 흡수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IP 수준의 멀티캐스트는 인터넷의 기반이 그 기능을 제공할 때만 동작하게 되므로 처음에는 거의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 멀티캐스트가 구현된 소규모의 네트워크들을 서로 연결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동안 연구, 실험 등이 진행되었다. 기반의 불완전한 지원은 멀티캐스트에 대한 사용자들의 요구를 끌어내는데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이러한 한계는 멀티캐스트 기술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게 되어 결국에는 상업적인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설령 이러한 진화의 자연스런 순환에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IP 수준의 멀티캐스트는 태생적으로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멀티캐스트 그룹이 여러 개의 관리 영역에 걸쳐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IP 수준의 멀티캐스트에서는 그룹에 속한 각 컴퓨터가 연결된 라우터를 서로 가상으로 연결하여 데이터를 전송하는 틀을 만든다. (대개는 이 틀을 나무 모양으로 만들고 데이터를 전송할 때에는 그 나무의 끝으로부터 가지를 따라서 전송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호스트가 같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에 연결되어 있는 경우보다는 여러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에 연결되는 것이 더 일반적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 데이터를 전송하기 위한 틀이나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정보는 서로 다른(게다가 거의 항상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의 관리 영역을 넘나들게 된다. 아직까지도 완전히 자동화 할 수 없는 BGP(Border Gateway Protocol) 관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다른 관리 영역에 걸친 상태 정보를 정확히 유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관리적,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직은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여

그렇다고 해서 멀티캐스트 기술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많은 응용이 멀티캐스트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시대에는 더욱 많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본다면 돌파구는 이미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각종 멀티미디어 전송 서비스를 보면 수요는 충분하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술과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의 참여이다.

기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2006년 7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 66 차 IETF 회의에서는 SAM(Scalable Adaptive Multicast)이라는 연구 그룹(RG; Research Group)이 발족되었다. 이 그룹에서는 IP 수준의 멀티캐스트 보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동안 제시되어 왔던 여러 기술들을 검토하여 다양한 규모(즉, 아주 큰 그룹, 그룹의 수가 아주 많은 경우 등)를 지원하고 기반의 IP 수준의 멀티캐스트 지원 여부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멀티캐스트 기술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차세대 인터넷 또는 통신/방송 융합망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로서 멀티캐스트를 꼽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투자를 하고 응용의 개발을 촉진할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부분은 여러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 걸친 그룹을 지원할 것인지 만약 그런 시나리오를 지원한다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 간의 비용 / 수익 정산 모델은 무엇인지 또는 더 근본적으로 인터넷 기반에서의 비용 / 수익 정산 모델은 지금 상태가 제대로인지 아니면 다시 전화망 모델(즉, 폐쇄 모델)로 되돌아 가는 것이 불가피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멀티캐스트 기술을 둘러싸고는 아직까지도 기대와 회의가 엇갈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수선함 또는 위기설은 우리가 이 기술을 왜 다시 곱씹어 보아야 하는지 하는 이유가 아닌가?